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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우토로에 희망을..!

[스크랩] 미군정 GHQ의 조선인 탄압정책

by 네 오 2007. 9. 14.

 

 

"일제 강제동원 마을 우토로의 역사 바로알기"

 

2007.9.13일 조회수 : "1520"   1520분에게 알렸습니다.

100,000분이 보실때 까지 계속 올립니다.

 

오늘부터는 연표를 따라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계속 포스팅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자료가 많은 것은 많은 대로, 없는 것은 없는대로 가겠습니다.

 

 

 

 

강제동원되는 국민들...

1941.      교토 비행장 용지가 좌산촌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으로 결정.
1941.7.   (주)일본국제항공공업 설립
1941.8.   교토부가 우토로 토지를 매입. 
             - 우토로에 한바(건설현장에 만들어지는 집단합숙용 가건물)가 만들어짐.

 

다시 돌아갈수 없는 조국...
1945.8.   일본 패전, 비행장 건설 중지, 13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방치됨.
1945.9.   미 점령군(GHQ) 일본국제항공공업 접수.
             - 우토로 한바는 주민의 저항으로 접수되지 못함. 
             - 우토로 조선인학교 자주적 건립
1945.12. 일본국제항공공업 사장 A급 전범 용의로 연행됨 (1946년 석방)
1949.12. 일본 정부에 의해 우토로 조선인학교 폐쇄

 

여기까지 내용을 좀더 자세히.....

↓↓↓↓↓

일본국제항공공업 츠다신고 사장이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다음해 석방된 것을 다루고 싶었는데

자료가 전무 합니다. 해서 GHQ(General Head Quarters)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조선인학교 건설운동과 GHQ·일본정부의 탄압

 

재일동포는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무엇보다도 민족교육을 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가 취한 조선인동화교육정책 극복이었다.

 

재일동포로서 빼앗긴 민족성을 되찾는 민족교육의 첫째 과제는 우리말을 되찾는 것이었다.

45년 9월에 결성된 재일조선인연맹은 조선인학교 설립에 집중했고,46년 10월 조선인학교는 초등 525개교, 중학교 4개교, 청년학교 10개교에 달했다고한다.(박종명 편 '재일조선인 역사·현상·전망)

 

그리하여 교육강령과 교육의 기본이념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학교운영을 개시했다.

 

재일동포의 자주적인 노력에 따른 학교건설운동이 앙양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의 민족자주권 운동과 민족반역일소 운동이 미군정의 통치 장애요소가 되자, 일본에서의 학교건설운동마저 같은 맥락으로 간주하여 GHQ는 조선인학교에 대해 억압정책을 실시한다.

 

48년에 들어서 일본정부도 GHQ의 정책에 호응하여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방침을 굳혔다. 일본정부는 48년 초, 조선인학교를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낸데 이어 전국의 조선인학교에 임대 교사의 양도와 사립학교로서의 인가신청을 요구했는데, 인가조건으로서 일본어만 사용할 것과 일본 교과서 사용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재일조선인은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의 자주성에 맡길 것과 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연속 발표했다.

 

폐쇄명령에 반대하는 조선인의 대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 GHQ와 일본정부 당국은 '비상사태선언'을 발령하여 검거하는 실력행사로 탄압을 가했다.

 

이어 49년에는 연맹에 대해 '단체 등 규제령'을 적용하여 해산시키고 10월에는 또 다시 조선인학교 폐쇄를 강행했다.

 

- 민족시보(97.3.11) 중 일부 인용 -  

 

하지만 일본의 교육개혁은 

 

비록 일본의 교육개혁은 GHQ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1945년 11월 ‘교육쇄신위원회’의 설치, 일본의 교원 및 교육자 조합을 결성, 여성교육의 쇄신책으로서 여자대학 창설, 대학의 남녀공학제를 채택하였으며, 1946년 4월에는 민주주의 교육연구회를 결성하여, 공민교육 실시 및 신교육지침을 각 학교에 시달하였다.

 

이런 교육계획의 수행으로 일본의 민주화, 자유화가 정립되게 된다.('일본의 교육개혁' 일부 인용-류미라)

 

 

결국 미군주도의 GHQ는 일본에게는 교육을, 재일조선인에게는 교육기회 폐쇄라는 철퇴를 가했네요. -_- 

 

 

한국전쟁으로 부활하는 전범기업 신일국공업
19??      일본국제항공공업이 회사를 신일국공업과 일국공업으로 분리
             - 명목상의 회사인 일국공업에게는 전쟁 책임 전가
             - 신일국공업은 트럭, 버스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재 탄생
1950~53 신일국공업 한국전쟁 특수. 6.25 계기로 부활한 전범기업
             - 동포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항공기 조립공장에서 미군용 자동차와 탄환을 생산
1952.3.   일본 경찰부대가 2회에 걸쳐 우토로 강제 조사
195?       6.25 전쟁 이후 비행장 터는 일본 정부가 사들여 육상자위대 주둔
             - 비행장 사택 일본 정부가 사들여 일본인들에게 불하
             - 우토로는 일본정부의 매입 불하 대상에서 제외
1961.      일국공업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 일관매수를 제안
             - 일국공업은 토지대금으로 수억 엔을 요구하자 주민 거절
             - 주민들은 전후 보상 차원에서 토지를 무상 불하주장

 

악덕기업 닛산차체공기의 등장
1962.      신일국공업 닛산차체공기에 합병
             - 우토로 토지 소유권 닛산차체공기로 넘어감

 

일본정부 전쟁보상 책임의 소멸

1965.      한일협정 체결
             -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전후 보상 요구에 응하지 않는 계기 마련

             - 전후 보상에 대한 개인 청구권 소멸, 보상은 조국에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닛산과 우지시의 차별정책
1970. 2.  우토로 주민 대표는 ‘토지 매각’을 요망하는 문서를 작성 닛산차체공기에 송부
              - 닛산차체공기는 주민요구 무시

1979.10.  우지시에 수도관 설치, 소화전 구비, 도로포장을 요청
             - 지주(닛산차체)의 승낙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

1983.      닛산차체 우토로 토지 매각 결정
             - 자칭 우토로 자치회장 히라야마 마스오(허창구)와 토지매각 협상
             - 토지 매각 협상사실 모른 채 일본 정부와 닛산차체에 전후보상 책임을 물어 무상 불하 요구
1985. 3.  화재가 발생해 창고와 민가 등 4채 전소
             - 지하수 오염으로 음용 불가 판정, 상수도 시설 미비로 화재 시 대응책 없음
1986. 6.   ‘우토로에 수도시설을 요망하는 시민의 모임’을 발족, 우지시내 서명운동 전개
1986. 8.   주민 381명의 서명을 첨부해 우지시에 수도 시설 요청서를 다시 제출

 

비극의 시작

1987.3.9.  허창구와 닛산차체 토지매매계약을 체결. 계약금액 3억 엔.
              - 주민들은 토지매매계약 사실 모르고 있음
1987.3.9.  닛산차체 수도관 시설 동의서를 우지시에 제출
1987.4.30  매입자금을 만들기 위해 민단 교토지방 본부장이었던 하병욱의 도움으로

               서일본식산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설립.

               이를 보증으로 하병욱은 허창구에게 토지매입대금 대출
1987.5.9.  서일본식산(하병욱)에게 4억4500만 엔에 우토로 토지 재 매각
              - 허창구는 서일본식산(하병욱)에게 토지를 4억엔에 매입했다고 속여 4억4500만엔에 매각 함
1988. 1.   우시지는 수도본관인 배수관의 매설 공사를 시작해 3월에 공사 완료
              우토로 약 절반 정도의 세대에 급수
1988. 3.   부동산업자들의 매매물건 답사로 허창구의 토지매입사실 알려짐
              - 허창구는 야반도주
1988. 9.   일본인 회사인 가나자와토건에 서일본식산을 매각
              하병욱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김(밝혀지지 않았음)
              민단의 소극적 태도가 하병욱(민단 교토지방본부장)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으로 보임

 

강제철거 통고와 싸움의 시작
1989.       서일본식산 우토로 주민들에게 철거 통고 시작
1989. 2.   토지를 인수한 서일본식산이 ‘건물수거 투지명도' 소송 제기
1989.3.    교토지법에서 첫 공판, 일본 시민들로 구성된 ‘우토로를지키는모임' 결성
1998. 1.   교토지법 패소 판결, 주민들 고법에 항소.
1998. 8.   일본 정부, 유엔사회권규약위원회에 2차 정부보고서 제출.
1998.12.  오사카고법 패소 판결, 최고재판소(대법원) 항소.
2000.       최고재판소 기각 결정.
2004. 1.   우토로 토지 등기부에서 소유자가 서일본식산에서 이노우에 마사미로 변경

 

조국의 관심과 무관심
2004. 9.   주일한국대사가 교토부 지사에게 선처 요청
2005. 2.   한국 NGO 우토로 실태조사
2005. 4.   <우토로 문제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우토로 시찰
2005. 4.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발족
2005.11.  반기문외교부 장관 국회발언

             "주민들의 자구노력, 또 민간모금, 이런 것을 봐가면서 정부 지원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2006.8.5  ‘우토로 살리기 희망 콘서트
2006.11   서일본식산과 이노우에 마사미간 소유권자간의 법적 분쟁 종료.(서일본식산 승소)
2007.6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국회발언

             '역사성'과 '형평성'을 고려해서 지원이 가능한 방안을 계속 강구하겠습니다." 입장 후퇴

              본국 귀환 또는 일본 내 사회시설 마련 시사
2007.7.16 ~9.30 우 토로의 마지막 호소 아고라청원 개시 (현재시간 기준 6697)
2007.7.22  철거위기 우토로 동포의 '마지막 희망순례'

 

우토로에 희망을~
2007.8.19  블로거 중심의 우토로살리기 운동 적극 전개
2007.8.31  토지협상기한 1개월 연장, 정부 적극적 대응 검토
               -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및 여야의원, 민간대책위 관계자, 정부부처 관계자 등이

                  참석하는 연석회의가 조만간 열릴 전망
2007. 9.1 아름다운 재단 - 우토로의 희망을 기다리는 마지막 30일 모금운동 개시

 

 

 

 

 

여기 저기 자료를 모아서 전체를 엮어 봤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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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의 희망을 기다리는 마지막 30일 시작~! (~ 2007.9.30)

우토로 토지소유권자에게 토지구입확정을 해주어야 하는 기한인 9월 30일까지 17일 남았습니다.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금과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토로의 희망을 기다리는 마지막 30일 참여 방법"

 

   ♥ 아고라 청원 바로가기 (10만인 서명을 향해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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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재단 무통장 입금
      하나은행 162-910006-81704 / 국민은행 006001-04-091586 (예금주:아름다운재단)

 

 

우토로마을을살리자 상단 우측

   
 
 
 
출처 : ARMA의 Lif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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