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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우토로에 희망을..!

[스크랩] [펌] 우토로와 비슷했던 나까무라 지구 해결 과정

by 네 오 2007. 9. 6.

이 글은 cateye님의 블루스토리에서 퍼온 글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렸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될 경우에는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원글 보기

 

우토로 문제와  약간 차이는 있지만,  거의 같은 역사를 걸어온 지역이 있습니다. 오사카의 위성도시 이타미(伊丹)시  나카무라 지구.
 
 "이타미"(伊丹)시는  지금의  <오사까 국제공항>("이타미공항"으로도 불리움) 에 근접해 있는 지역이며, 그중에도 "나카무라"지구는 쿄또의 "우토로"지역과 동일한 "토지문제"로 수  많은 재일 동포들이 격랑의 세파에 휩싸여 있던 지역입니다.

  다음, 네이버에도 거의 검색되지 않는 "나카무라"지구[ 이타미 공항과 이나가와 <효고현 지류 강>사이의 약 3.4 ha  일본 국유지 편입]의 역사는 오사카공항과의 역사 이기도 합니다.
 
  1938년에  이타미 비행장으로 정비가시작 되었으며,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항공시설 건설"을 위해 한반도 출신 "한국인"들이 관서 지방을 비롯해, 무작위로 동원되었으며(작업 인부중 70~80%가 한국인) 그들을 위해 공사 숙소가 4,5개  지어 졌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하천 부지에서 하루 종일 궤도차(탄광등에서 사용하는 화물차)에  자갈을 가득채워 나르고 있었다,  그  비참함은  잊을 수 가없다니깐] <나카무라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가진  李敬炳 씨(68, 2002년 당시)의  증언>

   전쟁 준비로 본격적인"공항 확장"을 꾀하던 일제는  많은 "한국인 노동자"를 이  지역에이주,동원시켰다고 합니다 .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여기서라도 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굶어 죽었을 거야] <동  李敬炳씨  증언>
  
 [여긴  내  맘이 머물고 있는 곳이야. 애착도 가고, 이 토지를 싸게 판다면 꼭  사고 싶어.
하지만  국가(일본정부)가 단순히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마지막까지  여기 남을 거야. "우리들의 역사가 여기에 묻어 있으니까"]<동 李敬炳 씨 증언>
 
  일본 패전 후 이번에는"미군"에  의해 비행장이 접수 되어 공항 주위 일변에 철조망이 설치되고, 보안 과 그외의 목적으로 공항으로 부터의 "퇴거 명령"을 주민에게 내렸다고 하며. 미군의 협박에 가까운 명령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행장은 1958년 일본에 반환되어 [오사카공항]이 됐고. 이윽고 "국제선  취항"을  이유로
 2개의 활주로 신설이 결정되었고, 매매된 용지는 "이타미"시에서만, 38 ha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전해  나가는 일본인 지주들에게 "권리 매매"(1평당  얼마라는 구두 계약)을 맺고, 집과 논밭을 샀지.] <나카무라 지구 자치회 위원 "朱宗燮"씨 (64  2002년 당시)>
 
  "권리 매매".  법적으로는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많은 주민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았던 말이라고 하며.  [실제로,  일본인이 여기서 농사를 지고 있었다. "권리매매"라고 해도  읽고, 쓰기가 안되니, 거의 구두 계약이나 마찬가지지.  밭에  나와있던 일본인 지주 들에게 말을 걸어 "토지 사용권"을  물려 받은 거라 생각해.] <나카무라 지구 자치회 위원 "朱宗燮"씨 (64  2002년 당시)>

 
  공항에 인접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항공기 소음의 방음공사]는 대상외로 취급 되었고,
"상하수도의 정비"도 없었다.  [불법 점거(일본 국유지라는 논리로)]는 주민들에게 견디기 힘든 매우 열악한 환경을 남겨 주었다.
  
   환경 개선을 위해 분주히 뛰어 다녔던 남편.   꼭 보세요 MORE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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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로폭 약 3m. 나카무라 지구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유일한 도로를 자동차가 거의 부딪힐정도의 간격으로 통행하고 있다.

 [中村(나카무라)에  도로가 생긴다면 물구나무서서 걸어 다니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었지]
요시코(芳子 가명 71)씨는 쓴 웃음을 지었다.
 
  1960년, 남편 영지(英志 일본이름 에이지 가명)씨와 함께 오사카로부터 이주해왔다. 도로는 미포장, 비라도 내리면 엉망진창이 되는 이(나카무라) 지구에  도로를 깔아보자라고 말을 꺼낸것은 "英志" 씨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의 거주지는 거의 모두가 "판잣집". 화재라도 나면 불꽃이 눈  깜짝할 새에
전  거주지를 덮쳤다.  이타미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4년 부터 1976년말까지 공식 통계로
8차례의 화재가 발생했었다.

  요시코 씨는 기억을 더듬으며
 [화재가 난 뒤에는, 항공국(이타미 공항 소속)의 직원이 와서,  접근금지 팻말을 세워놓고,
철조망을 쳤다. <불법점거(일본정부입장)>이니깐.  그래도 주민 모두 다 저녁이 되면, 철조망밑을 기어서라도 거주지에 들어가  판잣집은 새로 짓곤 했지. 지주를 세워놓고, 함석 지붕을
씌워서 말이야.]  

  국유지라고 해도, 주민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다시 주거지를 짓고,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2> 사람이  생활 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근본적 문제인 [배설]. 나카무라 지구의  자치회결성도, 바로 이문제를 계기로 발단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전까지 부탁해서 작업을 하던 "배설 처분 업자"가  오지 않게 되었다.
"이타미" 시의 "청소국"(환경국)이  <자치회>를 통하지 않으면 퍼 가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남편이 <자치회> 만들자라며 말을 꺼냈다] 라는 요시코 씨.

  그러나, 주민의 다수가 "반대"였다. [<그런게 왜필요해><이타미시 직할로 들어갈께 뻔해>
라며, 대부분이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걸 한집한집 돌아 설득했으니깐] <요시코 씨>

 약 1년 후 1972년에  <나카무라 자치회>로써  伊丹(이타미)시에  탄원서를 제출.  겨우 시의 승락을 받아내어 업자의 작업이 재개되었다.  요시코씨 남편 "영지"씨의 눈물어린 분투는
계속된다.
 
 [예를 들면 화재가 난 후, 항공국이 철조망을 치면, 남편이 공항까지 가서 "교섭"하는거야.
여기  주민들은 갈곳이 없다고.]

 [나카무라 지구 가까운 지역에는 "비행기의 연료 탱크"도 있어서 인화 하면 위험하다라든지,  "우물"로 생활하고 있으면 역병이 발생해 공항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상하수도"
가  필요하다라며강력히 호소했다니깐,  마지막에는 "행정감찰관"까지 면담했다고 하니, 못말리는 남자였지.]

 "영지"씨는 관계 기관과의 교섭을 끈질기게 계속해 나아갔다.

 그  결과,  상수도 공급은 1974년, 전화가설은  75년, 이타미 시장을 통해 "오사카항공국"으로  "진정서"가  보내져, [인도주의적 배려]로  허가 되었다. 또한, 그토록 염원했던 폭 3m의
도로는  그보다 이전인 73년, 건설성의 허가를 거쳐 "공용"가설이 개시되었다.

  "나카무라"지구의  환경개선을 위해 분주했던 "영지(에이지)"씨 였지만, 아내의 눈에는
가족을 내팽겨치고 자기의 일만하는 기댈 수 없는 "남편"이었다.

  [1년에 "250"일 정도 市役所 (시청)에 가서 무릅을 꿇으며 교섭을 하고 있었지. 집에는
당장 먹을 쌀도 떨어졌는데도...].  소리없이 눈물을 훔친적이 한 두번이 아니란고 한다.

   "영지"씨는  1989년,  향년64세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숨이 넘어갈때도 말하고 있었지. <이제 남은건 하수도 뿐이야>]라고 요시코 씨는 중얼 거렸다.

  [모두들  잊어버렸겠지만,  나카무라지구를 이 정도로 깨끗히 한건 그  사람. 그것만은 잊지 말아 줬으면 해..]

  <본문 중 가명사용.  취재 내용 발췌   "코베 신문">


 

  많은  우여 곡절 끝에 2001년 9월,  출구가 보이지 않던 사태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일본 정부가 "주민의 집단 이전"을 기본 방침으로 [효고현,이타미시]와 함께 [나카무라지구정비 협의회]를 발족시킨다.  주민들의 실태조사를 실시했고, 이전에 동반되는 "보상"등을
주민 자치회와  교섭하기 시작했다.

  교섭 결과, 이타미시 나카무라지구 근처에 "시영 주택"을 건설하여, 거기에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방향으로 결착 되었다.
 <나카무라 지구는 태평양전쟁 전의 공항 확장 공사를 계기로 인해, 많은 재일 한국,조선인 노동자들이 정착. 국유지의 "점거 상태"를 해소 하기 위해, 2001년 국가와 지방 자치회가 
주민의  집단 이전에 합의하고 보상협의를 계속 해왔다. .....  2002년 코베신문 뉴스 2월 16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타미시의 주민에 대한 열쇠및서류 증정식
 
 이타미 시에의하면,대상이 되는 208가구 중, 203가구가 "이전 보상"에 합의, 나머지 5가구도 이전에 응할 의사를 표했다고 전했다. <동  기사 발췌>

  현재,  완성된 市営桑津住宅 (시영 상률 주택)에 거의 모든 가구가 이전해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우토로와 나카무라 지구 두군데 모두  공항시설,강제이주 노동, 국유지의  불법 거주(일본 정부 입장)등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현  실정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토로"의  경우는  교섭 대상이 국가가 아닌 "철거 소송을 법원에 낸" <민간 기업 西日本殖産 >이라는  약간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즉, <日産車体>(토지의 본 소유회사)로부터 "우토로"지구의 토지를 주민의"동의, 허락"없이 사들인<주민회 회장>(매매거래 후 잠적), 그리고 그 주민회 회장이 세운 <(주)西日本殖産> 으로 다시 불법 매매.  

  이런 불법적이며 불가사의한 거래를 "우토로"주민들은 알 수 도 없었고, 어느날 갑자기 <민간 기업>으로 부터의 <사유지 불법점거 철거 소송>을 당하리라고는 누군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적인 재판소의 <철거 명령>이 떨어 졌으나,  [유엔]<코피아난 사무총장 때>의 중재가 들어와 <강제 철거의 운명>은 연장 되었다.  

  지켜보고 뒷짐만 지고 있는 일본 정부와  "정치적 이익과 선거에의 영향으로만" 움직이는 한국정부, 철거 소송낸 불법거래기업, 그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갈곳을 잃을 수 있는그들은  
 
   
   <수많은  일본 변호사와  이웃 일본 주민들의 응원, 남모르게 지원하는  한국의 자원봉사자들,  품속에 모아둔 비상금을 기부한 한국의 지성들,  평소엔  감정없이 살아가는 "누리꾼" 들의 자발적 성금 참여,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의 푼돈 모금 등의  응원 속에 >

  "비겁하며, 썩어빠진"조국  <대한민국> 의 국적을  부여잡고,
  오늘도 일본인으로의 귀화를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참조 기사
일본 코베 신문 020216 기사
똑 같은 하늘아래<이타미  나카무라 지구는 지금>

 

[ 펌 글 끝]

 

여기부터는 제 의견....우토로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윗 글의 상반부에서 제가 배운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해결 방법이 "네티즌 한 명 한 명이 나카무라 지구의 영지(英志 일본이름 에이지 가명)님이 하신 일을 조금씩 나누어서 하늘에 닿을 만큼의 정성을 보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토지 소유주도, 그 토지를 사려고 하는 사람도, 한일 양국 정부도, 한일 양국 국민을 포함한 세계인도,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도, 가능성을 노리는 사업가도......그 정성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늘 우토로를 위해 마음을 쓰고 계신 블로거분들의 아이디만 봐도 힘이 솟습니다. 우리의 진정성이 더 많은 이들의 심장에 전염되기를 바라며......

 

오늘은 펌글 신공만 죽어라 쓰고 나갑니다...헤헤헤~~~

^^;

 

 

 

 


출처 : sepial.net
글쓴이 : 심샛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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